5화 그 사람을 닮은 기척
뇌가 죄다 불타버릴 것 같을 정도로 증오했으면서 아직도 쓸쓸하다는 생각 따위를 하다니, 정말로 바보 같지만.
그 황금시대를 사랑했던 것이다.
내 손은 사랑했던 시간을 놓쳤다.
그렇기에 시노와 히스는…….
그들의 청춘은 지켜주고 싶다.
파우스트
…………!
갑자기, 본 적 없는 어두운 방이 머리를 스쳤다.
일그러진 공간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파우스트
(이 건물 어딘가에 그 방이 숨겨져 있는 건가……?)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자리의 기척을 살피기 위해 심호흡한다.
또 한번 방의 울타리가 보였다.
환상 같은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주문을 외운다.
파우스트
《사티르크나트 ・ 무르클리드》
다음 순간…….
우리는 낯선 방에 있었다.
시노
…………?! 여긴…….
파우스트
숨겨진 공간이야. 시노, 내 옆에서 멀어지지 마.
시노
……히스의 기척이 느껴져……. 그 녀석들도 여기 온 거 아냐?
파우스트
《사티르크나트 ・ 무르클리드》
나는 주문을 외워 방을 밝혔다.
파우스트
이곳은…….
빛이 밝혀지자 실내가 보였다.
거미줄이 쳐진 케케묵은 방이다.
책장에 놓인 물건들에는 어떤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파우스트
……마법사 길드의 문장……?
시노
파우스트!
날카로운 목소리로 시노가 나를 불렀다.
그는 방 구석에 앉아 무언가를 껴안아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만난 사냥꾼 타냐다.
타냐
……, ……으…….
시노
괜찮아? 정신 차려.
나는 재빠르게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깊은 상처를 입은 모습은 없다.
안색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뜬다.
놀란 듯 숨을 삼키고, 그녀가 시노의 팔을 붙잡았다.
타냐
히스클리프 님(殿)과 네로는?
시노
여긴 없어. 우리도 찾고 있어. 만난 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타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기억나지 않아. 여러 광경을 봤어.
어딘가에 끌려가려던 걸 네로가 감싸줬어.
나만 이 광경에 남겨졌고, 두 사람은 변하는 광경 너머로 사라졌어.
시노
두 사람한테 상처는?!
타냐
모르겠어. 백발의 남자와 싸우고 있었어.
파우스트
……백발의 남자…….
숨이 멎었다.
달을 소환한 마법사 노바와 같은 특징이다.
가슴이 옥죄인다.
나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 책장을 손 닿는 대로 살폈다.
파우스트
(공간마법이야. 여러 공간이 연결되어 있어. 네로와 히스는 어딘가에 있을 거야)
(네로에게는 타냐를 감쌀 여유가 있었어. 그렇다면 살아있을 거야)
(죽을지도 모를 때에 남을 감싸는 건……. ……그는 그럴 것 같지만)
시노가 타냐의 몸을 흔든다.
시노
말고는?! 그 외의 뭔가 실마리는 없어?!
타냐
……다른 실마리……. 아……. 이걸…….
타냐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나는 그들을 곁눈으로 보며 일지 같은 것을 발견했다.
먼지투성이의 표지를 펼친다.
동쪽의 마법사 길드의 기록, 이라고 희미해진 글자로 적혀 있었다.
파우스트
(집회와 방문자의 기록……. 이 호텔이 길드 본부였던 시대의 건가……)
(공간마법을 쓴 건 누구지? 노바인지, 아니면 길드 시대의 누군가가……)
(……응? 무르 하트 씨(氏)……)
알고 있는 이름이 눈에 들어와 무심코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췄다.
파우스트
(무르 하트 씨 방문……. 어느 고귀한 분의 의뢰로 진행되던 회전기밀계획에 대해 교섭……)
(당일 계획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으나, 두 국가를 아군으로 둔 무르 하트 씨를 우리가 막을 수 있을지 심히 의문스러움……)
(……회전기밀계획……?)
시노
이건……, 이건 히스의 회중시계야!
그때, 시노의 비통한 외침이 울렸다.
나는 시노를 돌아보았다.
불빛이 흔들리고, 다시 한번 어둠이 내린다.
어둠 속에서 시노는 두 손으로 회중시계를 움켜쥐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잘못 볼 리가 없다.
히스클리프의 마도구다.
지금 히스는 마도구를 소지하고 있지 않은 건가.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끼며 나는 타냐를 보았다.
어디서 주웠는지 물으려다가, 그 순간 말을 잃었다.
타냐가 미소짓고 있었다.
회중시계를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는 시노를 보며.
부자연스러운 미소에 소름이 돋았다.
직후, 타냐가 시노에게 팔을 뻗는다.
마치 껴안으려는 것처럼.
나는 순간적으로 시노의 로브를 붙잡고 기세 좋게 뒤로 끌어당겼다.
시노
……, 무……?!
동시에 타냐의 얼굴을 짓밟았다.
시노
파우스트?!
느낌은 없었다.
타냐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시노를 등 뒤로 감싸고 실내를 둘러본다.
갑자기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노바
난폭하구나.
파우스트
…………?!
결계를 치며 돌아본다.
섬뜩한 백발의 마법사가 그곳에 서 있었다.
도지기 인형의 눈에 박혀 있는 것 같은, 유리구슬 같은 자홍색 눈.
상처가 있는 왼쪽 눈, 의안인 오른쪽 눈.
어딘가, 남일이라는 듯한 조용한 미소.
시노
……이 녀석이 노바……?!
파우스트
타냐를 어떻게 한 거지?!
백발의 마법사가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며 웃었다.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악행을 저지르며 미소를 띠는 자는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뭔가 기묘했다.
예를 들면, 오웬은 의도했던 대로 악행이 열매를 맺으면 환희하며 웃는다.
선악의 판단은 뒤로 하더라도, 그 모습에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있다.
하지만 백발의 마법사는 어딘가 데면데면했다.
견학을 온 부외자처럼 조용히 서 있다.
파우스트
(마법사……. 마법사인 게 맞나?)
(정령들의 반응이 이상해. 인간은 아닐 텐데, 이 기척은 마치……)
(현자를 닮았어)
시노
네가 히스를 납치한 건가?!
시노가 목소리를 높인다.
그의 뺨은 공포로 굳어지고, 대낫의 자루를 쥔 손은 떨리고 있었다.
시노는 감정으로 나서지 않는다.
적의 역량을 잘못 가늠하지도 않는다.
역전의 전사이기에 가진 공포와 현명함이다.
노바는 남일이라는 듯이 웃었다.
그는 우리를 내려다보면서도 강한 증오나 어슴푸레한 야심이나 지배욕을 보이지는 않았다.
노바
네 눈으로 확인해라.
백발의 마법사가 스르륵 손바닥을 위로 향했다.
마법을 쓸 생각이다.
그 판단이 늦은 것은 정령들의 움직임이 둔했기 때문이다.
정령들은 강한 마력의 마법사에게 영향을 받는다.
영웅의 퍼레이드를 올려다보며 열광하는 민중처럼, 무관심하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령들은 영향도 받지 않고, 열광하지도 않고, 그저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같았다.
도구처럼 사역당하고 있다.
그가 펼친 손을 움켜쥔다.
세계가 어둠에 빠지고, 진흙처럼 무너졌다.
시노
파우스트……!
나는 순간적으로 시노를 감쌌다.
그를 감싸며 마도구인 거울에 눈부신 빛을 모은다.
어둠에 빠져가는 시야 너머, 백발의 마법사가 보였다.
파우스트
《사티르크나트 ・ 무르클리드》
반격하려 빛의 다발로 노바의 목덜미를 노렸다.
하지만 빛은 순식간에 무산되었다.
노바
히스는 기뻐하고 있을 거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어둠이 홍수처럼 우리를 밀어냈다.
시노
좋아해? …………?!
시노의 몸이 멀어져간다.
붕괴하는 공간에서 어둠을 갈라 가느다란 팔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끌어당겼다.
파우스트
내 손 놓지 마! 괜찮아! 반드시 히스를 만나게 해 줄게……!
시노
파우스트……, …………!
한 순간의 망설임 후, 시노가 내 팔에 매달렸다.
가까이서 닿은 체온이 뜨거웠다.
언제나 손이 따뜻했던 알렉을 떠올린다.
반사적으로 되살아난 기억에 혀를 찬다.
알렉을 떠올리며 돌이되다니, 절대 사양이다.
파우스트
(시노를 구하자……. 네로, 히스, 살아있어!)
암흑의 탁류가 우리를 집어삼켰다.